아프가니스탄 연대

아프가티스탄 전쟁의 발발배경 및 소개, 연합군 측과 탈레반측의 구성 국가

아프간 리포트 “다양한 민족의 땅 : 아프가니스탄”

기원전 6세기에는 조로아스터교의 발흥을, 또 그리스 문화와 불교문화가 융합된 간다라 미술을 낳았던 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스탄은 아시아와 중동, 동·서양이 연결되는 지정학적 조건으로 인해 다양한 민족이 분포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민족간 분쟁이 끊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지정학적 우세를 노리는 외세에 의해 오랜 기간동안 지역과 주민이 유린당해 왔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지역은 대부분 고도 1천미터를 넘는 고산지대에 험한 산맥과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고립적이고, 분산적인 지리적 특성은 각 민족들을 독립성이 강한 가운데 가족과 부족중심의 생활로 이끌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는 다수민족인 파쉬툰족(Pashtun, 인구의 약 50%), 농촌지역에 많이 분포한 이란계통의 타직족(인구의 25%), 중앙 고산지대에 살고 있는 몽골계통의 하자라족(시아파, 인구의 약 16%) 등 대표적인 민족들 외에 우즈벡족, 키르기즈족, 투르크만족, 누리스탄족 등이 살고 있습니다.

파쉬툰족은 아프가니스탄 지역을 통일하여 국가를 세운 민족으로 ‘파쉬툰 와레이(파쉬툰 정신)’라고 하는 독특한 도덕·관습법을 지키고 있는데, 용기·자유·독립을 숭상하며 이슬람교 이상으로 자신들을 규제하고 있습니다. ‘파쉬툰 와레이’ 중에서 바달(Badal, 복수), 멜마스티아(Melmastia, 환대), 나나와티(Nanawati, 보호)를 중요시 여기는 파쉬툰족은 특히, 바달을 가장 중요한 의무사항으로 여깁니다. 이러한 ‘파쉬툰 와레이’를 지키며 강한 부계사회이자 대가족제를 유지하기 위해 파쉬툰족은 다른 민족이나 외세에 의한 개입과 침략에 단호하게 대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크게 아프가니스탄의 민족분포는 파쉬툰족(Pashtun) 대 비파쉬툰족(non-Pashtun)으로 나눌 수 있는데, 18세기에 들어와서 파쉬툰족 내 두라니 부족이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통일국가를 건설하면서부터 이 지역에 갈등이 시작됐습니다. 즉, 중앙정부의 파쉬툰족 우대정책과 강한 부족중심의 자치 전통에 대한 간섭이 민족간 갈등을 초래한 것입니다. 더욱이 서구의 제국주의 진출과 냉전체제는 민족갈등과 더불어 외세와의 투쟁에 각 민족들이 이합집산하는 결과를 가져와 지역내 혼란과 갈등을 더욱 가중시켰습니다.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경계하던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자신의 영토로 만들고자 3차례에 걸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인들은 제1차 아프간전쟁(1838∼1842), 제2차 아프간전쟁(1878∼1880)을 거치면서 영국의 통치에 맞서 투쟁하였지만 1905년에 이르러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 중 아프가니스탄은 중립을 지키다가 국왕이 반영국주의를 표명하며 인도에 적대적 자세를 취한 결과 제3차 아프간전쟁(1919)이 발발하게 됐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로 라왈핀디 조약이 맺어져 영국의 외교지도권이 폐지되고 아프가니스탄은 독립을 얻게 되었습니다.

민족 자결을 위한 지난한 투쟁

독립이후에도 아프가니스탄은 다양한 민족간 갈등으로 불안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3년 무하마드 다우드가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제를 채택하여 아프가니스탄공화국을 선포했습니다. 지식인과 중산층 공산세력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던 무하마드 다우드도 1978년 소련과 아프가니스탄내 반대파인 왕가세력의 지원을 받는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주의 정당(the People`s Democratic Party of Afghanistan : PDPA)의 쿠데타로 실각하게 되고 아프가니스탄에는 공산주의 정권이 탄생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주의 정당(the People`s Democratic Party of Afghanistan : PDPA)은 정권출범 이후 다우드 정권의 와해에 동조하였던 이슬람교도동맹과 대립하게 됩니다. 또한 군부숙청작업에서 상당수 군인들이 반발하게 되고 토지개혁과 지방자치제 폐지 등의 조치를 취하는 과정에서 지방 부족들의 맹렬한 반발을 초래하였습니다.

인민민주당은 ▲중앙집권화 대 지방자치, ▲사회주의 대 이슬람주의, ▲무리한 근대화 정책 대 고유의 전통문화 등의 갈등지점에서 반대파를 형성, 대대적인 항쟁이 벌어지게 됐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28개주 가운데 23개주에서 항쟁이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내전의 지속으로 1979년 말까지 사상자 수가 5만명이 넘었고, 10만명 이상의 난민이 파키스탄으로 유입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정국이 혼미해진 가운데 당시 이란혁명의 성공 등으로 중앙아시아와 중동지역에는 이슬람 세력이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1979년 소련은, 타지크 공화국이 이슬람화 되는 것을 막는 한편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한 소련파에 의한 새로운 정권의 수립 등을 목적으로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고 직접 개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로 인해 아프가니스탄 분쟁은 이슬람 정부수립을 위한 반군연합과 공산정권 및 소련을 축으로 하는 전쟁(무자헤딘)으로 변모하였습니다. 이후 9년간 계속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1988년 유엔의 중재 하에 마침내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이에 따라 소련군이 철수하게 됐습니다. 소련군 철수이후 나지불라 정권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반군세력은 1992년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공화국을 수립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 분파로 이루어진 반정부연합세력이 정권주도권을 놓고 새로이 갈등하게 되면서 또다른 내전으로 상황은 악화됐습니다. 정권주도권을 두고 격돌한 세력은 크게 타직족(Tajik)을 중심으로 한 랍바니(Burhanuddin Rabbani) 전 대통령과 대소련항쟁의 영웅 마수드(Ahmad Shah Masud) 장군이 이끄는 세력, 총리로 내정되었으나 불복하며 내전을 시작한 헤그마티야르(Gulbuddin Hekmatyar)의 파쉬툰족(Pashtun) 중심의 정파, 시아파인 하자라족(Hazara)을 중심으로 한 정파 및 소련군의 장군이었던 우즈벡족(Uzbek)의 도스탐(Abdul Rashid Dostam)이 이끄는 세력이었습니다.

이 세력들의 갈등과정에서 파쉬툰족을 바탕으로 한 탈레반 세력이 파키스탄의 지원에 힘입어 주도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이슬람 율법을 배우는 학생’이라는 의미를 지닌 탈레반은 원래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슬람 원리주의자에 의해 파키스탄 난민촌에 설립된 종교학교 출신들로 이루어진 세력입니다.

1996년 수도 카불을 점령한 탈레반은 국명을 아프간 이슬람국으로 개칭하고 철저한 이슬람 원리주의에 입각한 정책을 시행하였습니다. 탈레반 정권은 여성의 직장활동과 교육을 금지했고, 범법자에 대한 가혹한 극형(손발 절단이나 투석형)도 부활시켰으며 2001년 3월에는 우상 숭배라는 이유로 2천년 역사를 가진 문화재인 바미안 석불을 파괴하는 등 이교도에 대한 배타적인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한때 미국의 지원을 받기도 했던 탈레반 정권이 반미주의 세력으로 변모한 것은 1998년에 있었던 미국의 미사일 공격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아프리카 케냐와 탄자니아 주재 미국대사관에 대한 폭탄테러가 있었으며 이 테러가 오사마 빈 라덴에 의해 저질러졌기 때문에 미국은 오사마 빈 라덴의 근거지로 추정되는 수단과 아프가니스탄에 미사일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9.11 테러 이후 그 주범으로 빈 라덴을 지목하면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신속하게 보복전을 개시하였습니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현재의 이라크 전쟁과 마찬가지로 중앙아시아의 석유에 대한 관심과 맞물려 있습니다. 전세계 매장량의 10%로 추정되는 아제르바이젠,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아프가니스탄 주변국들의 석유를 아라비아해로 연결하는 송유관 건설에 있어 아프가니스탄은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프가니스탄에 반미정권이 서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보복전은 미국 등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북부동맹 측의 지상전과 미국의 공중폭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탈레반 정권이 사실상 와해되었고, 탈레반 정권의 몰락 이후 아프간정파회의에 따라 파쉬툰족 11명, 타직족 8명, 하자라족 5명 우즈벡족 3명, 기타 3명으로 배분된 과도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 과도정부의 수반은 파쉬툰족 출신의 하미드 카르자이가 맡고 있습니다.

지울 수 없는 전쟁의 상처

1978년 이후 20여년이 넘게 계속된 전쟁 기간동안 참으로 많은 인권침해가 있었습니다.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에 따르면, 1978년 공산주의 정권은 수천명의 실종자들을 포함하여 많은 인권침해를 자행하였습니다.

1979년 소련의 침공 이후에는 수많은 고문과 즉결 처형이 있었고,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에 의하면 1989년 무차별 공중폭격으로 인하여 550만명의 난민이 발생하였습니다. 수천명이 정치범으로 수용되었고, 불공정한 재판을 받았으며, 전기고문과 구타 등을 동반한 심문에 처해졌습니다. 1980년부터 1988년까지 8천명 이상이 처형당했습니다. 이러한 고문과 처형은 반군세력에서도 역시 자행되었습니다.

소련군의 철수 이후에도 민중의 인권침해는 여전히 계속되었고, 탈레반이 주도권을 장악해나가는 과정에서도 시민들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 무차별적인 공중폭격, 보복살인, 즉결처형, 고문과 강간 등 심각한 인권침해가 있었습니다. 또한 탈레반 정권 하에서는 여성들의 활동과 교육, 직업 등을 엄격히 제한해 여성이 외출시 엄격한 옷차림 규제를 따르지 않았을 때는 구타를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최근 Human Rights Watch에 의하면, 2003년 3월 이후에 발생하는 분쟁관련 범죄는 국제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Court)에서 다룰 수 있습니다. 2003년 3월부터 아프가니스탄에서 국제형사재판규약이 발효될 예정이며, 이때부터 국제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Court)는 전쟁범죄, 대량학살, 인권에 대한 중대한 범죄들에 대한 조사와 기소권한을 가지게 됩니다. 강한 부족사회 전통으로 인하여 사법체계가 매우 허약한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국제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Court)의 활동은 전쟁범죄를 예방하고 범죄를 저지른 이후 처벌받지 않는 상황들을 개선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성의 권리에 대해서는 여전히 암울합니다. 최근 과도정부의 정책은 다시 탈레반 시대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Human Rights Watch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 서부의 허래트시(City of Herat) 이스마일 칸 장군의 정부는 최근에 여성과 여자아동들에 대한 교육기회를 박탈하는 정책을 취했습니다. 남성은 더 이상 여성과 소녀들에게 개인교습을 하지 않고, 소녀들은 소년들과 함께 학교건물에 있을 수 없게 됐습니다.

불행히도 이 사례는 여기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수도 카불을 벗어난 아프가니스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미군에 협조하였던 반탈레반 연합의 강력한 보수적인 지역 지도자들에 의해 여성에 대한 교육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많은 여성들과 소녀들은 학교와 대학으로 되돌아갔지만, “단지 학교문이 열려있을 뿐”이었습니다.

난민과 이주민들에 대한 문제 역시 아프가니스탄에 남겨진 심각한 문제입니다.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에 의하면, 미국의 공격이전에 이란과 파키스탄에 350만명(2001년 12월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난민이 유입되었고 110만명 이상의 주민이 아프가니스탄 자국에서 유랑하고 있는 것으로 밝혔습니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과 아프간 난민과 귀환국(Afghan Ministry of Refugees and Repatriation : MoRR)이 벌이는 귀환사업의 도움으로 2002년 한 해 동안 180만명 이상의 난민들이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25만명 이상의 자국내 유랑민들(internally displaced persons : IDPs)도 이 귀환사업에 따라 귀향하였고, 20만명의 아프가니스탄인들이 스스로 귀향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난민과 유랑민들의 귀향에 따라 아프가니스탄은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파괴된 인프라구조를 복구하고, 사회경제적 시스템을 정상화하는 것과 더불어 난민과 유랑민들의 삶에 대한 안전을 보장하는 것, 정착과 귀환에 필요한 즉각적인 지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아프가니스탄에는 유엔 산하 기구들과 많은 국제 NGO들이 다양한 분야에 걸쳐 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

교육, 농업과 식량안정, 식량원조, 상업 및 산업, 개발분야, 보건과 공공복지, 인권, 지뢰제거, 정착과 주택, 물과 공중위생 등의 분야에 걸쳐 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Migration(IOM), OXFAM Campaign, International Committee of the Red Cross(ICRC), CARE, Medicins Sans Faontieres(Doctors Without Borders), The International Rescue Committee(IRC) 등의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단체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는 국제사회가 아프가니스탄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실질적인 지원에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아프가니스탄에는 알 카에다 잔당 소탕을 목적으로 아직도 미군이 남아 있습니다. 2001년 10월 이후 미군에 의한 폭격과 북부동맹에 의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은 민간인들의 정확한 수와 재산피해정도는 알려지지 않지만 미국의 오폭과 불발탄, 대인지뢰 등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사례가 여전히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2001년 12월에는 미국의 폭격으로 25명의 어린이를 포함한 52명의 민간인의 죽음이 유엔에 의해 확인되었고, CNN뉴스에 따르면 2002년 2월에 있었던 폭격에서도 적어도 17명의 민간인이 사망하였는데, 대부분이 여성과 어린이라고 현지관리의 말을 인용하여 밝혔습니다. 또한 미국 관타나모기지로 압송된 탈레반 군인과 알 카에다 군인들에게 수갑을 채우고 발을 묶어 두는 등 인권침해적 처분이 이뤄지고 있어 ‘테러와의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끝나지 않은 전쟁의 피해는 폭격이 진행되는 기간동안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고통은 고스란히 아프가니스탄의 민중들이 겪고 있습니다. 2003년 2월 15일 지구촌의 곳곳에서 울려퍼진 반전과 평화의 목소리는 이와 같은 참상이 지역을 옮겨 이라크에서 다시 한번 발생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일 것입니다. 전쟁은 어떠한 목적과 수단으로서도 정당화될 수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지구촌 시민사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벌이는 전쟁은 더욱더 찬성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입장은 분명합니다. “Stop the War! No Blood for O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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